본문 바로가기

음악.예술

::일기:::2/2/2013

::일기
:::2/2/2013

 

 

 

 

1. 런던 시내 한 커피전문점(costa)에 와있다. 오후 7시에 근처 전철역(underground)에서 친구와 약속이 있어서 왔는데 이제 6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다. 그동안 여기서 시간을 보내기로 하고 커피한잔 시켜놓고 자리를 잡아 앉았다. 테이블에 누군가가 신문(evening news)을 놓고 갔다. 신문을 읽으려고 머릿기사들을 훑었다. 커피숖에서 틀어주는 음악소리가 간간히 귀에 들어온다. 여기서 신문읽기를 잠시 그만두고 음악을 들었다. 재즈(jazz)다. 미셸 페트루치아니(Michel Petrucciani)의 'Brazilian suite'다. 오래간만에 재즈를 듣는다. 몇년전부터 국악(Korean classical music)만 듣고 살았더니 이제는 재즈음악이 조금 낯설게 느껴진다. 그런데 싫지는 않다. 한때 재즈를 좋아했고 연주하면서 살기도 했기 때문이다.(piano) 근데 지금은 재즈를 비롯한 서양음악(western music)과는 이혼한 상태다. 

 

 

2. 지금, 커피숖 창가 너머로 사람들의 걸음걸이(walking)가 보인다. 사람들마다 걸음걸이에 자신들만의 고유한 '템포(tempo)'가 있다. 그 사람의 신장(height), 심리상태, 발의 (의학적) 구조, 그리고 심장박동수 등 여러가지 심리-신체적 요인에 따라서 걷는 속도가 다르다. 이러한 걸음걸이의 템포에는 인종(race)간의 특성(differentiation)은 없어 보인다. 빨리걷는 황인종(mongolian)이 있는가 하면 느리게 걷는 황인종도 있다. 흑인(negroid)도 마찬가지고 백인(caucasian)도 그렇다. 걷는 속도는 인종과는 상관없이 개인의 특수성(신체적, 심리적, 물리적 요인 등)에 의해서 결정되어지는 것 같다. 그런데 다시 한번 창가 너머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관찰했다. 내 귀에는 여전히 재즈음악이 들어오고 있었다. 음악을 들으면서 동시에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관찰해보니까 인종마다 걷는 '리듬(rhythm)'이 다르게 느껴진다. (나에게 있어선) 확실히 백인들이 걷는 리듬은 우리랑 다르다. 흑인도 마찬가지로 다르다. (여기선 편의상 이 세가지 인종만 언급했지만, 지구상에는 수십여개의 인종이 존재한다)

 

 

3. 백인들의 걷기(step)는 '규칙성'이 있어 보인다. 마치 그들의 악보에 적힌 '박자'(time)대로 그들은 일정한 시간적 간격을 두고 보폭을 조절해 나간다. 그들의 '박자'개념은 '철저하게' 수학적 공식(mathematical formula)에 근거한다. 4/4박자, 6/8박자, 3/4박자 등 이는 모두 음악이 진행되는 '시간적 흐름을' 수학적 개념으로 쪼갠 단위다. 그래서, 그들의 음악에는 '규칙성'은 있지만 '여백'(space)과 '휴지'(idle)가 부족하다. 다시 창문밖을 바라본다. 한 중년 백인 남성이 걷고 있는 모습을 보면 마치 메트로놈(metronome, 박자 측정기)을 틀어놓고 거기에 맞춰서 걷는 느낌을 받는다. 이 남성의 걸음걸이에는 머뭇거림이 없다. 일정한 보폭으로 걷거나, 아니면 걸음을 완전히 멈추고 서서 자신의 손목시계를 바라보거나, 거의 둘 중 하나의 행동적 패턴을 보인다. 난 이런 백인들의 'Walking rhythm' (걷기의 박자)에서 일정한 (수학적)규칙성이 주는 '정돈의 안정감(order)'과 '단순성'(simplicity)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무자비할 정도로 (ruthlessly) 그들의 '냉정함(heartlessness)'을 감지해 낸다. 수학적 공식에는 '예외(exception)'라는 것이 없다. 정해진 규칙하에서 일정한 형식과 패턴을 따라가야 한다. 만약 조금이라도 '오차(error)'가 생기면 그 공식은 깨지게 되어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백인들의 걸음걸이에는 '오차'에 대한 강박증(obsession)이 존재하고, 이는 곧 자신이 걷는 주변환경(surroundings)에 대한 무관심(indifference)으로 이어진다. 오로지 자신의 걷기에 대한 '정확성'에만 신경을써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변환경에 대한 무관심은 타인의 안전에 대한 태만(omission)을 야기할 수 있다. 즉, 자신 주변의 위험에 처한 사람들에 대해서 감지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이들의 이러한 습성(traits)은 음악에 잘 반영이 된다. 오차없는 일정한 시간적 간격의 반복적인 리듬, 기승전결 잘 짜여진 곡의 구성, 완벽한 화음(harmony)의 규칙성 등, 이들 요소 모두 '정확성'을 요구 한다. 이러한 정확성을 바탕으로 한 음악이기 때문에, 그들의 음악에서는 작품속에 내재되어 있는 음악 외적인 '공간적 배경'(spatial surroundings)과의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을 소홀히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그들의 작품에서 우리는 '소리'(sound)만 인지하고 여백과 휴지(idle/space)는 감지하기 힘들다. 이는, 각 악기들이 정해진 규칙과 공식하에서 서로 오차(error)를 최소화 하면서 연주되어야 하기 때문에 공간적배경과 소통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일종의 '음악적 무음(musical mute)'에 대한 태만(omission)으로 볼 수도 있다. (아래 내가 링크한 Bee Gees의 'More than a woman'을 한 번 들어보면, 우리 귀에 순전히 들어오는 것은 '소리(악기, 보컬)'뿐이다. 이 음악에서는 여백(spatial surroundings)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나마 있는 여백을 String pad (복수의 바이올린으로 연주되는 배경음)사운드로 채우고 있다.) 

 

다음으로, 내가 인지(recognition)한 흑인들의 걷기의 박자(walking rhythm)는 '다채롭고(dynamic)' '유연하다(flexible)'. 그들은 끊임없이 온몸을 움직이면서(흔들면서) 걷지만 주변환경에 대한 반응에 따라 민감하고 신속하게 반응한다. 그렇기 때문에 백인들의 보행과는 달리 '단순성'과 '안정감'은 없지만, 주변환경(surroundings)에 대한 그때그때(ad-hoc) 신속한 반응과 인지(혹은 커뮤니케이션)를 통해서 '탁월한 유연성'의 조화(harmony)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그들의 보행은 '산만'하다.(distractive) 걷기에 있어서, 자신과 주변과의 커뮤니케이션의 빈도수가 너무 잦기 때문에 그들은 목적지를 향해 가면서도 마치 '방황하는(wandering)' 것 처럼 보인다. 이는 마치 규칙성 없는 '방임'(laissez-faire)으로, 오차(error)에 대한 강박증 없이 그 때 그 때 상황에 따라 주어진 문제를 해결해 나가겠다는 행태를 반영하는 듯 하다. 따라서, 이들의 음악은 백인들의 음악과는 달리 다이내믹하고 (또한 화려하고) 공간(Space)과의 소통을 원할하게 해서 듣는이로 하여금 '신체적 환기(physical arousal)'를 쉽게 끌어낸다. 미국의 흑인 실험음악가 '선라(Run Ra)'의 아프리카 토속음악을 배경으로 작곡된 '유카탄(Yukatan)'을 들어보면, 이들의 음악에서 주는 리듬의 다채로움과 단순한 멜로디와 공간과의 유연하고 신속한 의사소통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잘 알 수 있다. (이 음악에서, 리듬은 다양한 템포로 반복되나 멜로디의 흐름에 따라서 순간순간 변화하고, 멜로디는 공간과 소통을 위해 일정한 여백과 휴지를 반복한다) 이러한 흑인음악의 특성과 백인음악의 그것이 조화를 이룬것이 '재즈' 이다. 재즈의 규칙적인 형식(곡의 구성, 하모니, 악기의 구성 등)은 백인음악에서, 그리고 연주의 형식(즉흥연주(improvisation), 정형적이고 단조로움을 탈피한 리듬, 악기들간의 상호 커뮤니케이션 등)은 흑인음악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재즈의 형식적인 자유로움과 공간과 신속하게 소통하는 임기응변, 그러나 치밀하게 구성된 세련된 하모니에 매료되어, 한 때 '재즈(jazz)'를 가장 진보한(most advanced) 음악으로 생각했었고 이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난 재즈에 대해 회의를 가지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재즈도 역시 마찬가지로 '여백(space)'과 '휴지(idle)'가 부족했다. 즉, 재즈도 역시 소리(sound) 그 자체에 치중한 음악이고, '음악적 무음'(musical mute/idle)에 대한 상상력을 청취자에게 제공할 만한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주질 않는다. 따라서, 백인음악이건 흑인음악이건, 혹은 재즈 건, 일단 레코드에서 음악이 끝나면 그 '여운'이 오래가질 않는다. 이는, 그들의 음악이 청취자에게 제공하는 '심리적 반향(psychological reverberation)'을 오로지 소리(sound)에만 호소(appeal)하기 때문이다. '공간'과 '휴지'(idle)를 통한 충분한 심리적 여운의 전달 없이. 그렇기 때문에 좋아하는 곡이 있으면 계속 다시 들어야 한다. 그러나 이제 곧 언급할 한국의 '국악'은 청취자에게 이와는 다른 반향을 준다. 

 

이제는 동양인의 'Walking rhythm'을 말할때다. 내가 지금 런던에 있는 한 카페의 창문으로 본 동양인들의 발걸음은 확실히 위에서 언급한 두 인종들에 비해서 '흐느적(swing)'거린다. 이들은 '힘차게(vigorous)' 걷는 것도 아니고, 확실히 서있는 것(standing)도 아닌 애매모호한(ambiguous) 동작(movement)으로 목적지를 향해 천천히(slowly) 나아간다. 그리고 끊임없이 주변을 둘러보면서 동시에 걸어간다. 동양인들의 걸음(steps)은 백인과 같이 '규칙성'이나 혹은 흑인의 '유연성'은 없다. 대신 주변환경(surroundings)에 대한 인지능력이 탁월하다. 동양인들은 천천히 걸으면서 주변을 살핀다. 그리고 나서 자신의 목적지(destination)를 향한 '동선(moving line)'을 그때그때 환경이 변화할 때 마다 계산해 나간다. 즉, 동양인은 공간적/환경적 적응능력이 좋다. 그러나 이들의 걸음은 백인과는 달리 '안정감(/규칙성)'이 좀 부족하고 흑인과 같이 신속하게 공간에 대한 '신체적 임기응변'(physical adaptation to circumstance)능력이 탁월하지 못하다. 이는 국악(Korean classical music)에도 잘 반영되 있다. '산조'와 같은 기악곡을 들으면(예: 신쾌동 '거문고 산조') 일정한 규칙에 의한 박자에 얽매이지 않고 연주자의 감성적 흐름에 따라서 음악의 강약 그리고 리듬이 변화한다. 이 때, 음악의 정점(climax)에서는 소리의 강도와 리듬이 최고로 고조 되고, 종결부분이나 전환부분에서는 거의 '무음'(musical mute/idle)의 연주가 진행된다. 즉, 흑인과 백인음악과는 달리 사운드(sound)와 리듬(rhythm)의 편차가 크고, 일정한 형식이 아닌 연주자의 감성 상태에 따라서 음악의 강도가 결정되므로, 청취자로 하여금 '공간(space)'과 '휴지(idle)'에 대한 집중력을 높여준다. 그 이유는, 음악의 '예상되는 규칙성(expected cycle)'의 정도가 약하기 때문에, 그러한 불규칙한 연주형태에서 오는 청취자의 긴장(tension)이 공간(space)과 쉽게 타협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청취자는 소리 외적인 것 - 무음의 상상력 (imagination from mute)-을 길러나가고, 음악이 끝났을 때에는 이러한 상상력의 여운이 길게 남는다. 그래서 국악은 보통 음악이 끝나면 서양음악과는 달리 오랜 여운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 때의 여운의 시간 역시 '음악 감상'시간에 해당된다. 즉, 어떻게 보면, 서양음악보다 국악이 청취자에게 더 능동적인 감상(appreciation)력을 요구한다. 하지만 서양음악의 규칙성이 주는 치밀한 심리적 반향과 흑인음악의 다이내믹한 (청취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이 부족하기 때문에 감상(appreciation)에 대한 몰입도가 그 둘에 비해서 낮다.

 

 

4. 7시 10분전에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근처 전철역에 도착했다고. 커피숖 자리를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오늘 난 새 구두를 샀다. 전에 신던 구두가 너무 헐어서 비가오면 방수가 되지 않아서 새 신발을 살 수 밖에 없는 상황 이었다. 10년이나 신었으니까. 구두(western shoes)는 서양화다. 애초부터 그들의 신체상황에 맞춰서 개발되었을 거다. 난 이 구두를 신고 한국 전통 가락에 맞춰서 제대로 춤을 출 수는 없다. 그러나 앞서 말한 '세 인종'(백인, 흑인, 황인)의 특성을 살려 나만의 편한 '스텝(step, 발걸음)'을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지금 난 새로산 구두를 쳐다보면서 새로운 타협점을 모색하고 있다.*Kim.